그저 묵상

묵상 11, 마가복음 11:7~11, 그 길을 홀로 가셨다

보이지않는교회 2025. 4. 3. 08:50

11.

25.2.7(금)

마가복음 11:7~11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그 길을 홀로 가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을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고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습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겉옷을 길에 펴서 깔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동안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들과 전하셨던 말씀들이 이스라엘 전역에 메시아를 꿈꾸게 했고, 이제 그 기대들이 한곳에 이렇게 모여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이날 유월절에 “호산나”(주님, 이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외치는 소리가 예루살렘 성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작은 해프닝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자들도 있었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회중들 사이에서 율법을 실천하며 가르치던 바리새인들과 성전에 앉아 율법을 집행하던 권세자들은 예수를 환영하는 이 무리들을 분명 어리석다고 봤을 것이고, 또 예수님의 모든 것이 아니꼽게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로마의 총독과 군인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그들만의 소란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그들의 힘 앞에서 그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는 작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이처럼 제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환영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불편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곁에서 같이 환호를 받으며 무언가 가슴속에 뭉클 차오르는 알 수 없는 기대를 한껏 억누르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걷는 이 길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말입니다.

이때로부터 약 170년 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리아 헬라 제국의 폭력과 억압, 과한 세금 부과와 율법과 성전에 대한 온갖 모독을 더 이상 참지 못한 유다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행해지던 우상 제사를 치워버리고, 불의와 타협하는 자들을 처단하고, 민중을 향해 “누구든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라고 외쳤습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저항이 이렇게 시작되었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적은 무리가 제국과 싸워 이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142년, 마카비의 형이었던 시몬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위대한 메시아의 행보를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아마 이런 기대가 자리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고 기대하는 하나님 나라는 시몬이 이루었던 정치적 독립, 세금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뜨거운 종교적 열심의 회복이었을 것입니다. 과거의 마카비 시대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그들 역시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이나 제사장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은커녕 율법과 자주 부딪히고 심지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저 예수를 결코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마카비처럼 율법을 열성으로 지지하고 제국에 맞서 저항하였다면 어쩌면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메시아로 인정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속으로는 사탄의 지시를 받으면서 겉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 예언자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로마가 보기에도 예수님의 행보는 별것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장을 하지도 않았고, 군대를 동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 말을 타고 수도에 입성하는 그런 종류의 개선식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나르는 나귀를 타고 오셨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직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 없는 어린 나귀를 말입니다. 나귀마저 어설펐던 것입니다. 사람 태우는 것이 익숙치 않은 나귀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고 로마 사람들은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웃었을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주님, 주님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그들의 모든 기대와 상관없이, 그들의 모든 비난과 상관없이, 오직 자신을 이곳에 보내신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의 말씀(슥 9:9)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공의,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곧 죄와 죽음을 깨뜨리고 완전한 생명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어린 나귀를 타고 그 길을 홀로 가셨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무리들과 제자들의 따름 속에서 그분만 홀로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걸으셨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슥 9:9)”

종려나무 가지를 내려놓으십시오. 당신의 그 환호도 그치십시오. 또는 자기의 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 교만도 버리십시오. 그리고 또는 자기의 권세를 의지하여 예수님을 비웃는 자만도 죽이십시오. 그저 저 예수를 따라가십시오. 그가 지금 홀로 하나님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

주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걸어가신 그 길을 우리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큰 짐을 어찌 홀로 지고 가셨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찌 그것을 그토록 가볍게만 봤을까요? 오늘 우리는 떠드는 입을 그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을 침묵함으로 묵상합니다. 오직 주님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세가 영원히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