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 마가복음 2:8~12, 선 넘은 예수
2.
25.1.28(화)
마가복음 2:8~12
8 예수께서,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마음으로 알아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 환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말하기가 쉬우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서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걷어서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선 넘은 예수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마가복음 2장에 가서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대체 예수가 누군데?”라는 질문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심으로 자신이 부정한 자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15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라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드러난 하나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부정하고, 거절했습니다.
가버나움 어느 집에서 있었던 중풍병자 이야기 역시 단순한 기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 역시 앞의 나병환자 이야기처럼 예수님이 병든 사람을 고치셨다는 단순한 이적 레퍼토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오히려 논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단순하게 중풍병자를 고치는 것으로 끝날 수 있는 이 이야기에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라는 말을 던짐으로 일부러 일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정신 나간 소리다. 예수는 선을 넘었다. 하나님 말고 누가 감히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후에 이 사람은 자기의 발로 일어나 침상을 들고나갔습니다. 병이 나은 것입니다. 아니, 진짜로 이 사람의 죄가 용서받은 것입니다. 아니, 예수에게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할까요? 자신들이 틀렸음이 드러났으니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일까요? 그들의 반응은 우리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는데 하며, 그저 쩜쩜쩜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사람들은 그 앞에서 더욱 자신의 고집을 견고하게 합니다. 그 고집의 끝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고집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고집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그 일이 기적의 단순함을 넘어 거룩과 죄사함의 능력으로 드러났을 때에도 꺾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기 싫어서입니다. 주님, 놀랍도록 연약한 우리가 이토록 놀랍게 악한 것을 우리가 발견합니다. 중풍병자를 부르시고, 그를 고치시고, 그의 죄를 사하신 주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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