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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0일, 사순절 제4주, 누가복음 15:1~3, 11b~32, 잃어버린 나를 찾아 오신 분 본문

성서일과와 메시지

2025년 3월 30일, 사순절 제4주, 누가복음 15:1~3, 11b~32, 잃어버린 나를 찾아 오신 분

보이지않는교회 2025. 4. 2. 22:23

2025년 3월 30일, 사순절 제4주

누가복음 15:1~3, 11b~32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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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신 분

#1.

고3 때 담임 선생님은 똠방이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똠방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리들은 선생님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똠방 선생님은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웃기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들의 고3 시절은 너무 긴장되지도 그렇다고 너무 풀어지지도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수업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주말에 아들이랑 동물원에 갔는데, 그 아들이 호랑이에게 질문 하나를 했다는 것입니다. ‘대체 뭐라고 했을까? 똠방 선생님의 아들이라면, 왠지 기대가 되는걸!’ 우리는 모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꼬마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멀리 있는 호랑이가 들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습니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선생님은 때아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질문이 뭐냐는 건데, 질문은 이렇습니다.

“왜 사니, 호랑아!”

이 당돌한 꼬마에게서 나온 질문은 주전 5세기 아테네 시를 완전히 뒤흔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에 준하는 심오함이 베어 있습니다. 과연 그 호랑이는 살면서 이 질문에 대해서 한 번이나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요? 무관심한 혹은 뭔가 생각에 잠긴 것인지도 모르는 호랑이의 덤덤한 표정을 뒤로 한 채 선생님은 아들을 번쩍 들어서 급히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아, 똠방 선생님, 너무 아쉽습니다. 어쩌면 호랑이에게 있어서 그날의 질문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호랑이에게는 분명 그 꼬마가 의미 있는 첫 사람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침마다 자기에게 철창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있어도, 끼니때마다 생닭을 던져주는 사람은 있어도, 자기를 아무 의미 없이 쳐다보며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있어도, 이토록 자기의 삶에 깊이 들어와서 존재의 의미를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 똠방 선생님, 너무 아쉽습니다. 선생님이 지리를 가르치지 않고 윤리를 가르치는 분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랬다면 선생님은 위대한 철학자의 앞길을 그렇게 빨리 막아서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왜 사는가? 또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를 향한 질문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은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시대여서, 권위나 질서나 가치에 도전하는 모든 질문들에 있어서 대단히 관대하지만, 유독 영원한 것과 절대적인 것과 그리고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은 터부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질문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이 들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가 사고를 치고 나서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말입니다.

#2.

이 작은 아들은 아주 호래자식입니다. 이 자식이, 욕은 아니고, 지시대명사일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이 자식이 아버지에게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있지 않냐고, 그것을 지금 좀 달라고 합니다. 그 몫은 나중에 상속으로 받을 몫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죽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식은 지금 자신의 몫을 미리 땅기는 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을 미리 땡기는 것 아닙니까? 여하튼 요즘 시대에도 이렇게 대범한 호래자식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구절을 아주 담백하게 기록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들이 달라고 하니까, 아버지는 그냥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도 혹시…, 그냥 한번…, 아니, 말이라도? … 아, 아닙니다. 우리는 차마 그렇게까지 막돼먹은 인간 말종이 되지는 맙시다.

우리는 이 작은 아들이 어디에다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두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그것은 돈입니다. 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아주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는 돈이 자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돈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의 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특별하고, 내가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가치 있어 보인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받을 자기의 몫을 지금 당장에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좀 있어 보이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던 것이죠.

이 자식은 아버지의 재산을 받자마자 당장에 팔아버려서 돈으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나요? 아버지를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아무 존재감 없이 살던 시절을 완전히 끝내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돈이 생겼으니, 이제 그도 아버지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존재 그 자체로 명함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누가 봐도 돈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좋은 사람입니다. 돈 많은 것이 왜 좋은 사람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따져봐야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것이 보통 통용되는 논리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냥 그는 돈 많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정말 좋은 것만 있습니다.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인기가 좋았고, 평판이 좋았고, 성품도 좋았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친구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그는 정말 돈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돈 없이 지내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삶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 어리석은 청년은 한 번도 제힘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기에 돈의 가치도 몰랐고 돈을 쓸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다못해 나중을 위해 얼마를 떼어 놓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들이 돈을 그저 방탕하게 써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돈을 금방 낭비해 버렸다고 했습니다.

자, 이제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다시 돈 없는 사람입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가 좋은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좋은 집도, 좋은 옷도, 좋은 음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나빠졌습니다. 그는 인기가 나빠졌고, 관계가 나빠졌고, 평판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 사람이 사실은 성품도 나빴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는 특별함이 없었고, 가치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다시 돌아와서, 우리들 이야기를 해봅시다. 혹시 여러분 중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는 뚜렷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마치 영원의 기억을 삭제당한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다가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는 것이죠. 성장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자싸우, 뭐죠?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그리고 우는 것. 이렇게 딱 4가지만 할 줄 압니다. 처음에는 ‘나’라는 인식 자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를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다가 관계를 배우게 됩니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죠. 다행히 나중에는 아빠도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자라나면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사물과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가게에 가서 돈을 내기 전까지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배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부터 여러 관계들을 경험하면서 내가 되어갑니다. 그러니까 삶이란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바르게 답하는 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증명을 요구받으면서 살아갑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너는 무엇을 잘하는지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주로 공부를 잘하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공부가 시원찮아 보이면, 다음에는 혹시 운동을 잘하냐고 물어봅니다. 그것도 아니면 음악이나 미술, 뭐가 됐는 나중에 써먹을 수 있는 어떤 것 또는 남들보다 잘한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해 보라는 요구를 합니다. 점수와 등수로 존재와 가치를 평가하는 오늘날의 학교 시스템은 어린 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어쩌면 지나치게 잔인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라서 경험하게 될 사회의 모습에 비한다면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낭만적인 구석이 좀 있습니다. 학교가 낭만적이라 함은 그래도 사회보다는 덜 노골적이라는 말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모든 것이 싸늘해집니다. 이상을 논하던 인문학적 성찰은 사라집니다. 결국에 기승전‘돈’, 돈만 따지는 냉정한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격려하고 위로하던 따뜻한 선생님은 이제 없습니다. 겁주고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상사만 있을 뿐입니다. 잔뜩 얼어있는 그들에게 사회는 자기증명을 또다시 요구합니다. 대학이 어디냐? 학점은 몇 점 만점에 평균 몇 점이냐? 전공은 하나냐 아니면 두 개냐? 어학연수를 다녀왔냐? 할 줄 아는 외국어는 몇 개냐? 몇 점이냐? 인턴 경험이 있냐? 증명할 만한 다른 경력이 있냐? 자격증은 몇 개냐? 그것은 몇 급이냐? 숨이 차도록 몰아치는 질문 공세에 초라한 이력서를 제출할 때면, 우리의 청년들은 스스로 초라함을 느끼고 맙니다.

삶이란 게 이런 식입니다. 아침이면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가거나, 낮이면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밤이면 집에 돌아와서 잠깐 쉬거나 아니면 그때까지 공부 또는 일을 하거나. 그리고 다음 날이면 같은 삶이 또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우리는 잠깐의 여유도 없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이 쏟아지는 바람에, 또는 자기 증명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작 본인 스스로에게는 “나는 누구지?”라고 묻는 자기 자신과의 가장 중요한 대화의 시간을 놓쳐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나이가 들어버립니다. 어른이 되어버립니다. 질문만 받다가 정작 스스로에게는 질문하지 못하는 존재로 굳어집니다.

어른이 된다고 자기 증명이 끝이 나나요? 아니요, 그럴 리가요. 끝없는 비교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세상이 묻습니다. 어김없이 증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공손하게 하지만 음흉한 속마음은 감춘 채로. 혹시 집은 강남인가요? 아님 강북인가요? 평수는 어떻게 되나요? 자가인가요? 전세인가요? 설마 월세는 아니겠죠? 차는 국산인가요? 얼핏 보니까 외제인 것 같던데, B사, 그 B 아니고 다른 B사, 아니면 P사? 설마 한 대는 아니겠죠? 요즘 두 대는 필수니까요. 참, 자녀들은 공부 잘하고 있죠? 대학이 어디라고 했었죠? 인 서울은 당연할 것이고, 들은 것 같은데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이런, 내 정신 좀 봐. 결혼할 나이가 되었겠네요. 당연히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있죠? 당연히 집도 구했을 테고, 차도 아마 두 대는 있을 것이고, 그래도 아직은 젊으니까 국산 차겠죠?

여러분,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것인지 아시겠나요? 끝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무리 바쁘게 살고, 아무리 열심히 살고, 아무리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우리 자신을 증명한다 해도 거기에 만족은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기란 정말 힘들죠. 누구나 1등이 되고 싶고,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지만 그런 사람은 결국 소수에 불과합니다. 진짜 힘든 것은 이런 것을 거의 갖추지 못했을 경우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여기에 속합니다. 이 사람들이 경험하는 삶의 공허함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종종 능력의 부족이거나 자격의 부족이고, 지식의 부족이거나 돈의 부족입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부족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 명예, 지식, 관계, 건강 등을 자기 존재의 근거로 삼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잃을 때 자기를 상실합니다. 사업에 실패할 때 자기를 상실합니다. 관계가 깨지거나 소중한 관계를 잃을 때 역시 자기를 상실합니다. 평판이 무너져도 자기를 상실합니다. 늙어서 외모가 추해져도 자기를 상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기 자신으로 사십시오. 그 말은 세상이 요구하는 방식의 증명을 완전히 무시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해도 되고, 취업을 안 해도 되고, 결혼을 안 해도 되고. 그런 식으로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더 열심히 사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일도 하십시오. 할 수만 있으면 부자도 되십시오. 그래서 좋은 집도 사고, 좋은 차도 타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얼마든지 많이 다니십시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해서,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고, 그때 스스로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어느 순간 내면의 진실과 마주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겉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이만하면 얼추 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삶에는 내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분명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데,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고, 그냥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진단 말입니다. 그것은 허무함이고 두려움이고 지독한 불안입니다.

언젠가 죽음이 우리 앞에 설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최대한 미뤄 놓고 싶은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장 엄격한 자기 증명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입니다. 죽음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때 부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부자입니다.” 죽음이 다시 묻습니다. “그래? 그럼 너의 부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부자는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을 때 세상에서 단 한 푼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그에게 또 묻습니다. “너를 증명할 다른 것을 또 내놓아보아라.” 그는 자기가 평생을 바쳐서 얻어왔던 소중한 것들을 꺼내려고 이리저리 뒤져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모든 성취들이 죽음과 함께 시간 속에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먼저 자기 자신이 되십시오. 돈이 있으면 내가 특별해진 것 같고 또 돈이 없으면 내가 무가치해진 것 같이 느껴지는 그런 존재의 방식, 그러니까 언제든지 있고 없고에 따라서 흔들릴 수 있는 그런 자기가 되지 마십시오. 흔들릴 수 없고, 상실될 수 없고, 결코 소멸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되십시오. 시간이 끝나고 영원에 들어서는 죽음의 순간에서 조차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십시오. 그래서 죽음이 너는 누구냐고 묻거든, “나는 자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십시오. 그런데 그런 자기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4.

탕자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합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더욱더 드라마틱 하게 끌어가십니다. 이 불쌍한 탕자는 가진 돈을 다 써버렸는데, 때마침 그 지역에 흉년까지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식은 아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장에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빌어먹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고 천한 종들이나 하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는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얻어먹을까 했는데, 그마저도 거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 돼지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다 잃어버린 다음에야 이 자식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비로소 제정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17~18절에서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 자식은 드디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시인할 참이었습니다. 그는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들로서 아버지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저 품꾼만 되어도 족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찾아봐도 갈 곳이 없고, 갈 곳이 딱 한 군데 밖에는 없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집에 가까이 와가는데, 멀리 입구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입니다. 아니, 뛰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달려와서 측은한 눈빛으로 그 자식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원망도 책망도 비난의 눈빛도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사랑하는, 단 한순간도 그 사랑을 멈춰본 적이 없는 그런 눈빛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서 더러워지고 지저분한, 이 죄 많은 그의 목을 꽉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할 말을 합니다. 종들에게 들뜨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22~24절의 말씀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이 자식은 다시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끊어졌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이 자식이라고 부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잃어버렸던 진짜 자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그는 자기의 죄 때문에, 아들이 되었어도, 사실은 어딘가 부족해진 것은 아닐까요? 흠이 가거나 손상이 갔거나 예전만 못한 대우를 받거나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우리들은 부모로서 자녀를 용서할 때조차 종종 용서를 하면서도 끝을 흐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뭐라고 합니까? “그래도 네가 잘못했지?”라고 합니다. 자녀가 “네,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면, 부모는 “뭘 잘못했는데?”라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셨습니다. 반지는 그가 아들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가 아들이면, 그는 다시 상속자입니다. 아무 흠도 없습니다. 아무런 부족함도 없습니다. 이 아들은 온전하게 아들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종들에게 물어보니, 글쎄 망나니 같은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를 위해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잔치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28절을 보니까, 그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달랬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섭섭한 마음을 꺼내듭니다. 29~30절입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말합니다. 31~32절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맏아들의 억울함과 짜증과 섭섭함은 한편으로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진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왜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 머물러 있을까요? 그를 정말로 화나게 하는 것은 저 못된 녀석이 다시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상속권을 다시 회복한 것이 정말로 싫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아버지가 자기에게 미리 나눠 준 맏아들의 몫, 그러니까 율법에 따라서 차자에 비해 두 배로 받은 몫 중 일부를 그와 나눠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를 진짜로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맏아들은 그렇게 아버지 밖에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 밖에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가 지금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5.

팀 캘러 목사님은 이 이야기에 숨겨진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들었습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 셋 다 모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앞의 두 비유에서는 잃은 것을 찾아 나선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떠납니다. 온 들과 산을 찾아 헤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양 한 마리를 찾으면, 기뻐하면서 자기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양이 지쳤을까 봐 어깨에 메고 오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기와 함께 기뻐해달라고 말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그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그 값은 족히 양 한 마리를 넘고도 남을 것입니다.

드라크마를 찾는 어떤 여자도 마찬가집니다. 그녀는 열 개의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찾아서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한바탕 큰 난리를 치고 나서야 드라크마 하나를 찾습니다. 그러면 그녀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라며, 잔치를 벌입니다. 그 값 역시 한 드라크마를 족히 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찾아 나선 이가 없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자신의 비참한 처지 속에서 뉘우치며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항상 집 앞 어귀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만약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떠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바로 맏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맏아들이라면, 그는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동생을 찾아오겠습니다. 그가 어디까지 갔던, 얼마나 멀리까지 갔던, 제가 거기까지 가겠습니다. 제가 가서 반드시 동생을 다시 아버지에게로 데려오겠습니다. 만일 그때 제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치러서라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와 함께 아버지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비유 속 맏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맏아들이 있는데, 그게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아서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버리고 이 땅까지 오셨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기 동생을 찾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을 되찾기 위한 대가가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임을 알았을 때에도 그는 결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는 애초에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럴 작정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배반하고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마지막 날 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들 ‘모두’를 마지막 유월절 잔치에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고난당하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랐다.” (눅 22:15)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지금 자기가 죽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그중 하나는 자기를 팔아버리고 결국에 모두 자기를 떠나버릴 텐데 말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못된 자들을, 잃어버린 자기의 동생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죄인들을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실 수가 있었냔 말입니다.

그것이 그의 간절한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똑같은 심정으로 그도 자기의 동생들을 찾기 바랐기 때문입니다. 얼른 그들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가서 “아버지, 여기 동생을 찾았습니다. 여기 당신의 아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보다 앞서서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우리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늘 집 어귀에 서서 매일 우리를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달려와서 우리의 목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면서, 우리를 준비된 잔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밤에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유월절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눅 22:1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유월절 잔치가 하늘에서 열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날에 우리도 다락방의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기쁨의 잔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6.

이제 결론입니다. 우리는 자기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성공했어도 자기를 잃으면 실패한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가 됐어도 자기를 잃으면 가난한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를 잃으면 무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자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기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빼앗길 수 없어야 합니다. 무엇에 의존해서 기생하는 것처럼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런 것들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자기의 노력이나, 신분이나, 자격이나, 능력이나 그 어떤 가치와 가능성으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자기가 되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관계 안에서 자라면서 나를 인식하고 너를 알아가고 궁극적으로 내가 되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되고 영원한 자기는 오직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믿음이라는 다리를 놓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결코 믿음을 버리지 마십시오. 어떤 유혹과 시험과 고난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결코 믿음을 버리지는 마십시오. 영원 앞에서 믿음과 견주어 바꿀 수 있는 핑계는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믿음 안에서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저 똑똑한 학생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믿음 안에서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저 돈 많은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믿음 안에서 자기입니까? 아니면, 그저 평범한 직장인입니까? 또는 그저 엄마이거나 아빠이거나 교인이거나 집사이거나 권사이거나 장로입니까?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과 같이, 오직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자기(사람)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되어야 합니다. (엡 4:13)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나십시오. 더욱 진실한 기도를 드리고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반복적으로 노력하십시오. 나이가 들수록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섬김을 받기 보다는 도리어 먼저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자가 곧 나라고 할 수 있는 자기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영혼의 열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잘 익어가십시오.

주님,

우리가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갔을 때,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면 더 가치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계획에 대하여 얼마나 충실한 성취를 얻었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결국 자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거룩하신 분께서 가장 낮고 천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다시 사셨습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시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불리는 이름을 가진 내가 되었습니다. 영원토록 이 이름을 가진 나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라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pFEpsz2W-_E